COORDINATE X

A DROP

한 방울

SPECIAL PROLOGUE · 약 20–25분

본편에는 아동 대상 폭력, 신체 변형 및 총기 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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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이 휴지통에 버려지는 광경을 먼저 봤고, 그로부터 얼마 뒤 사람처럼 생긴 것을 먹었다.

둘 다 열네 살 때였다.

요코가 버려진 날에는 비가 왔다.

산을 타고 내려온 빗물이 오래된 아스팔트를 검게 적셨다. 버스도 거의 다니지 않는 도로의 끝에는 회색 시멘트 건물 한 채가 있었다. 녹이 슨 철제 놀이터와 절반쯤 무너진 담장, 담장보다 멀쩡한 정문.

정문 옆에는 시에서 발급한 허가증이 액자에 걸려 있었다.

아동 보호시설.

정원 열두 명.

생활지도원 한 명.

의료 지원 가능.

적혀 있는 내용 중 사실에 가까운 것은 정원 정도였다.

그곳을 관리하는 인간은 칼슨 한 명뿐이었다.

칼슨은 매일 새벽 사무실에서 커피를 내렸다. 평범한 분쇄 원두였다. 종이 필터 위로 뜨거운 물을 천천히 붓고, 갈색 액체가 유리 포트에 차오르는 것을 지켜봤다.

커피 냄새는 그 건물에서 나는 냄새 가운데 유일하게 정상적이었다.

그는 설탕을 넣지 않았다.

왼손으로 컵을 들고 오른손으로 서류를 넘겼다. 허리에는 늘 권총이 있었다. 아이들을 트럭에 태울 때도, 식료품 상자를 옮길 때도, 목욕탕 앞에서 인원을 셀 때도 찼다. 가죽 홀스터의 가장자리가 닳아 총 손잡이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총을 꺼내는 장면을 본 아이는 없었다.

그래도 모두 그 총이 장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칼슨이 담당하는 것은 바깥이었다.

구청 직원이 오면 웃었다.

후원자가 방문하면 깨끗한 방만 보여줬다.

병원에는 건강한 아이들의 기록만 보냈다.

사라진 아이가 있으면 친척에게 인계됐다고 적었다. 돌아온 아이가 말을 못 하면 적응 장애라고 썼고, 팔이 움직이지 않으면 선천성 질환이라고 적었다. 열이 오래 내리지 않으면 입소 전부터 몸이 약했다고 했다.

칼슨은 도장을 찍어 이곳을 고아원으로 만들었다.

그것이 그의 일이었다.

안쪽은 다른 존재의 일이었다.

우리는 그 존재를 The Man이라고 불렀다.

누가 처음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는지는 몰랐다. 칼슨이 알려준 이름도 아니었다. 다른 이름을 붙이기에는 그것이 사람처럼 보였고, 사람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멀리 가 있었다.

The Man은 자주 나타나지 않았다.

일주일 동안 한 번도 보이지 않을 때가 있었고, 어떤 달에는 세 번씩 내려오기도 했다.

그가 나타나는 날에는 아이들이 먼저 알았다.

칼슨이 커피를 반쯤 남겼다.

권총의 안전장치를 확인했다.

식당 문을 평소보다 일찍 잠갔다.

그리고 복도 끝에 검은 것이 서 있었다.

The Man은 키가 컸다.

천장보다 크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 정도였다면 차라리 이해하기 쉬웠을 것이다.

그는 복도 안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복도의 크기에 맞지 않았다. 머리는 천장에 닿지 않았지만, 시선을 올리면 목이 계속 이어지는 것 같았다.

검은 외피는 정장처럼 보였다. 옷깃도 단추도 분명하지 않았다. 팔은 몸 옆에 곧게 내려와 있었고 손끝은 무릎 아래에서 멈췄다.

얼굴은 희었다.

달걀껍질처럼 매끈했다.

눈도, 코도, 입도 없었다.

그런데 보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The Man은 아이 하나를 골랐다.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기다렸다.

끌고 가지 않았다. 팔을 비틀지도 않았다. 아이가 스스로 그 손을 잡을 때까지 가만히 서 있었다.

거절한 아이는 없었다.

거절했던 아이들은 이미 없었기 때문이다.

The Man과 함께 사라진 아이는 돌아오지 않거나, 돌아와도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아키라는 돌아온 뒤 잠을 자지 않았다. 밤새 벽을 보고 앉아 있다가 아침이 되면 쓰러졌다.

마리는 음식의 이름을 잊었다. 밥과 물과 자기 손가락을 같은 이름으로 불렀다.

케이는 웃을 때마다 입안에서 종이를 빠르게 넘기는 소리가 났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울었다.

그다음에는 숨었다.

나중에는 식판을 받으러 줄을 섰다.

사라지는 일은 특별한 사건이 아니었다. 산속에 겨울이 오는 것과 비슷했다.

무서워해도 왔다.

미워해도 왔다.

우리는 받아들인 척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러지 못한 애들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요코도 그중 하나였다.

요코는 나와 친했다고 말하기에는 애매했다. 나는 그때 누구에게도 정을 주지 않았다. 이름을 오래 기억하면 사라졌을 때 귀찮아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요코는 가끔 내 옆에 앉았다.

남은 빵을 줬고, 내가 돌려주면 다음 날 또 줬다. 긴장할 때는 오른쪽 소매 끝을 손가락에 감았다. 왼쪽 눈썹 끝에는 짧은 흉터가 있었다.

그날 The Man은 요코와 나를 데려갔다.

요코가 먼저였다.

나는 다음 차례였다.

고아원 뒤편 산자락에는 오래된 저택이 숨어 있었다.

정문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세탁실 뒤의 잠긴 문을 지나고, 비에 젖은 산길을 조금 내려가야 했다. 나무 사이로 들어가면 검은 벽돌로 지어진 집이 나타났다.

창문의 절반은 판자로 막혀 있었다.

현관과 복도에는 먼지가 없었다.

오래된 목재에서는 왁스 냄새가 났다. 벽 양쪽에는 문들이 있었고, 손잡이 위에는 이름 대신 번호가 붙어 있었다.

The Man은 요코의 손을 잡고 지하로 내려갔다.

나는 두 걸음 뒤에서 따라갔다.

계단은 저택의 깊이보다 오래 이어졌다. 바닥에는 층 표시가 없었다. The Man이 문을 열면 그곳이 몇 층이든 방이 나왔다.

요코가 들어간 방에는 탁자 하나와 투명한 수조, 금속 쓰레기통이 있었다.

탁자 위에는 새 두루마리 휴지가 놓여 있었다.

평범해 보였다.

흰색이었다.

얇았고, 손으로 잡으면 쉽게 찢어질 것 같았다.

The Man은 요코에게 두루마리를 들게 했다.

요코의 손이 떨렸다.

그녀는 휴지를 수조 위로 옮기다가 놓쳤다.

두루마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반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흰 종이가 풀리며 축축한 시멘트 바닥에 닿았다.

물이 쏟아진 것도 아닌데 바닥이 꺼졌다.

휴지가 닿은 부분부터 시멘트가 색을 잃었다. 먼지가 되지도 않았고, 녹아 흐르지도 않았다.

바닥의 단단함이 종이 안으로 옮겨 붙었다.

얇은 휴지 위에 회색 시멘트의 질감이 눌려 들어갔다. 작은 균열과 모래알, 신발 바닥에 긁힌 자국까지 알아볼 수 있었다.

요코가 당황해 두루마리를 집으려 했다.

The Man의 팔이 갈라졌다.

검은 촉수 하나가 손목 안쪽에서 뻗어 나왔다. 촉수 끝이 휴지 심 안으로 들어갔다.

딱 맞았다.

The Man이 촉수를 돌렸다.

바닥에 풀린 종이가 빠르게 감겼다.

동시에 반대쪽에서 새 휴지가 펼쳐졌다.

요코가 뒤로 물러섰다.

흰 종이가 그녀의 팔에 닿았다.

젖는 소리가 났다.

요코는 비명을 지르지 못했다.

팔의 표면이 물처럼 무너져 종이에 붙었다. 살과 옷과 뼈는 따로 나뉘지 않았다. 사람의 색과 형태가 얇은 휴지 위에 한꺼번에 눌려 들어갔다.

The Man이 촉수를 더 돌렸다.

흰 종이가 요코의 가슴과 얼굴을 지나갔다.

한 장이 넘어갈 때마다 요코는 줄어들었다.

오른쪽 소매가 종이에 박혔다.

왼쪽 눈썹의 흉터가 가느다란 선으로 남았다.

마지막에는 발끝이 하나 남았다.

휴지가 한 번 스쳤다.

발끝도 없어졌다.

두루마리는 처음과 비슷한 크기로 돌아왔다.

조금 무거워졌을 뿐이었다.

표면에는 젖은 머리카락 한 올과 손톱의 반달, 눈동자처럼 보이는 검은 얼룩이 박혀 있었다.

휴지는 더 이상 축축하지 않았다.

단단해진 표면을 촉수가 두드리자 얇은 플라스틱 같은 소리가 났다.

The Man은 두루마리를 뽑았다.

금속 쓰레기통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버렸다.

툭.

사람 한 명이 사라진 것치고는 가벼운 소리였다.

나는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숨을 쉬지 못했다.

도망치지도 못했다.

The Man의 하얀 얼굴이 나를 향했다.

아무것도 없는 얼굴이었다.

그 뒤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했다.

공포와 동시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요코였는지.

왜 휴지였는지.

휴지 안에 들어간 요코가 아직 요코인지.

쓰레기통을 열면 다시 꺼낼 수 있는지.

질문이 생긴다는 사실이 공포보다 더 역겨웠다.

The Man은 한동안 나를 들여다봤다.

나는 그날 내가 죽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내 손을 잡지 않았다.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인 뒤 그대로 방을 나갔다.

칼슨은 저녁 식사 때 요코의 의자를 치웠다.

사무실로 돌아가 식은 커피를 마셨다.

서류에는 친척 인계라고 적었다.

그날 이후 나는 The Man을 미워했다.

무서워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은 달랐다.

무서우면 피한다.

미워하면 계속 본다.

나는 The Man이 나타날 때마다 눈을 피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얼굴 뒤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었다.

린은 나보다 먼저 고아원에 들어왔다.

그가 열한 살 때였다.

나는 열두 살에 왔다.

우리가 열네 살이 되기까지 함께 있던 아이들의 절반 이상이 바뀌었다. 린과 나는 오래된 축에 속했다.

린은 백혈병을 앓고 있었다.

칼슨의 서류에는 선천성 질환이라고 적혀 있었다. 린은 세 번째 실험 전까지 그런 병이 없었다고 했다.

계단 한 층을 오르면 숨을 골랐고, 겨울에는 손끝이 자주 파랗게 변했다. 칼슨이 나눠주는 약을 먹으면 반나절 동안 손이 떨렸다.

그렇다고 약한 애는 아니었다.

힘이 없었을 뿐이다.

린은 이상한 걸 좋아했다.

문이 잠겨 있으면 열려고 했고, 숫자가 맞지 않으면 이유를 찾았다. 칼슨이 창고 자물쇠를 바꾸면 그날 안에 열쇠의 톱니 수를 알아냈다.

한번은 식사 중에 갑자기 말했다.

“사라진 애들보다 돌아온 애들이 더 이상하지 않아?”

나는 국을 먹었다.

“둘 다 이상해.”

“사라진 애들은 답이잖아.”

“뭔 답.”

“없어졌다는 답.”

“돌아온 애들은?”

“문제가 남아 있지.”

린은 별일 아닌 것처럼 말했다.

그러고는 빵을 국에 찍었다.

겉으로 보면 우스운 애였다. 몸에 맞지 않게 큰 슬리퍼를 끌고 다녔고, 기침하다가 자기가 낸 소리에 놀라기도 했다.

칼슨이 바로 뒤에서 감시하고 있는데도 숟가락으로 자물쇠를 따는 시늉을 하다가 손등을 맞았다.

린은 맞은 손을 털며 말했다.

“거의 열었는데.”

자물쇠에는 숟가락이 들어갈 틈조차 없었다.

하지만 눈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린은 정상인 척하고 있었다.

그 눈에는 겁보다 호기심이 먼저 차올랐다.

미스터리에는 답이 있다고 믿었다.

답을 얻는 과정이 목숨보다 재미있다고 믿는 얼굴이었다.

미친 애였다.

아무도 몰랐지만 나는 알았다.

린은 실험실에 끌려갈 때도 겁먹은 척했다.

The Man이 몸을 검사하고, 팔에 관을 꽂고, 알아들을 수 없는 문장을 읽는 동안 그는 눈을 반쯤 감았다.

칼슨은 약이 들었다고 생각했다.

The Man은 반응이 줄었다고 기록했다.

린은 자는 척하며 책을 읽었다.

실험실 벽에는 오래된 책들이 있었다.

사람 가죽처럼 보이는 표지.

글자가 움직이는 페이지.

읽은 문장을 지우면 다른 문장이 올라오는 종이.

린은 고개를 들지 않고도 펼쳐진 쪽의 내용을 외웠다. 거꾸로 놓인 문장도 읽었고, 유리관에 반사된 글자도 기억했다.

실험이 끝난 뒤에는 내게 조각만 흘렸다.

“이름은 부르는 게 아니라 지정하는 거래.”

“누가.”

“이름 있는 것들.”

“너 또 미친 소리 한다.”

“없는 것들도 이름 하나쯤은 갖고 싶어 해.”

그런 말이었다.

농담처럼 들리지만 버리면 안 되는 말.

린은 늘 핵심을 쓰레기처럼 툭 던졌다.

산길 아래 실험동 지하 2층 세 번째 방에는 주스 머신이 있었다.

아이들이 붙인 이름이었다.

나는 직접 본 적이 없었다.

린은 여러 번 봤다.

크기는 평범한 음료 자판기와 비슷하다고 했다. 낡은 금속 몸체에 음료 사진이 붙어 있었고, 사진 아래에는 번호와 작은 불이 달려 있었다.

동전을 넣고 번호를 누르면 전면에 붙은 음료가 나왔다.

커피를 누르면 커피.

과일주스를 누르면 과일주스.

그것만 보면 오래된 자판기와 다를 게 없었다.

이상한 것은 배출구 위에 붙은 QWERTY 자판이었다.

원하는 것을 글자로 입력하고 엔터를 누르면, 기계가 그것을 액체로 내려준다는 소문이 있었다.

컵은 따로 가져가야 했다.

기계가 컵을 주지는 않았다. 받치지 못한 액체는 배출구 아래의 검은 구멍으로 들어가 사라졌다. 출력 도중 컵을 치워도 기계는 멈추지 않았다.

아무 동전이나 받는 것도 아니었다.

한쪽에는 10¢, 다른 쪽에는 닳아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상형문자가 새겨진 오래된 주화만 사용할 수 있었다.

하루에 한 번.

포도라고 입력하면 포도주스.

휘발유라고 입력하면 휘발유.

수면이라고 입력하면 마신 사람을 재우는 투명한 액체.

소문은 매번 달랐다.

하지만 실패에 관한 이야기는 같았다.

기준에 맞지 않는 요구를 입력하면 음료 사진 옆의 초록불이 잠깐 빨갛게 변했다.

기계 안쪽에서 짧은 진동음이 났다.

본체는 움직이지 않았다.

액체도 나오지 않았다.

넣었던 주화만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의 한 번도 그대로 사라졌다.

“그걸로 뭘 뽑을 건데.”

내가 물었을 때 린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답.”

“답이 무슨 맛인데.”

“그래서 확인해야지.”

“먹고 죽으면.”

“답은 나오네.”

린은 웃었다.

나는 웃지 않았다.

“그 기계 뒤에 뭔가 있어.”

“벽 있겠지.”

“그런 뜻 말고.”

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안 나오는 게 너무 많아.”

“고장 났겠지.”

“고장 난 기계는 기준이 없어.”

린은 빵 끝을 손톱으로 눌렀다.

“저건 골라서 거절해.”

그는 주스 머신이 물질을 만드는 기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요청을 판단하는 무언가.

단어와 소유자와 값을 연결하는 무언가.

요청한 사람이 그 값을 지불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창구.

나는 그 말을 전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도 린을 믿었다.

내가 다른 아이들에게 하지 않던 일이었다.

실험 전날 밤, 린은 내 침대 아래에 앉아 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자는 척했다. 멀리 있는 칼슨의 사무실에서 라디오가 작게 울렸다.

린이 말했다.

“내일 나를 꼭 지켜봐줘.”

“보고 있잖아.”

“끝까지.”

나는 몸을 일으켰다.

린은 평소에도 이상한 말을 했다.

하지만 부탁은 하지 않았다.

자기 몫을 나눠달라고도 하지 않았고, 실험실에 같이 가달라고도 하지 않았다. 맞고 돌아온 날에도 약을 달라고 한 적이 없었다.

그런 린이 처음으로 내게 뭔가를 부탁했다.

말보다 눈이 더 기억에 남았다.

겁먹은 눈은 아니었다.

이미 어디까지 갈지 정해놓은 사람의 눈이었다.

“내일 뭐 있는데.”

“순서가 왔어.”

그 말이면 충분했다.

The Man.

린은 주머니에서 숟가락 하나를 꺼냈다.

숟가락의 둥근 머리는 잘려 있었고, 남은 손잡이 끝은 오래 갈아낸 열쇠처럼 울퉁불퉁했다.

“실험동 창고 뒤쪽 문.”

그가 내 손에 쥐여줬다.

“두 번 돌리고 위로 들어.”

“이걸로 열려?”

“어제는 열렸어.”

“어제?”

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숟가락 열쇠를 침대 옆 배기구 안에 숨겼다.

그러자 린이 말했다.

“The Man 저 새끼가 죽으면, 남는 걸 먹어줘.”

“뭘.”

“남는 거.”

“안 먹어.”

“알아.”

“너 진짜 미쳤냐?”

“그것도 알아.”

린은 이불 끝의 실밥을 손가락에 감았다가 풀었다.

“근데 네가 먹어야 해.”

“왜.”

“네 거니까.”

“똑바로 말해.”

“내가 아는 건 거기까지야.”

그날도 설명은 없었다.

다음 날 오후 일곱 시가 되기 조금 전, 칼슨은 식당으로 갔다.

그는 매일 같은 시간에 저녁을 먹었다. 밥을 먹는 동안에도 권총은 허리에 있었지만, 고아원 뒤편은 직접 확인하지 않았다.

저녁 식사만큼은 The Man도 건드리지 않는다고 믿는 것 같았다.

The Man은 린을 데리고 고아원 밖으로 나갔다.

주스 머신이 있는 곳은 고아원 지하가 아니었다.

산길 아래쪽에 떨어져 있는 별도의 실험동이었다. 겉으로 보면 창고와 크게 다르지 않은 건물이었다.

나는 둘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배기구 안에 숨겨둔 숟가락 열쇠를 꺼냈다.

식당에서는 접시와 수저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칼슨이 저녁을 먹고 있었다.

나는 담장을 돌아 실험동 뒤편으로 달렸다.

창고 쪽 뒷문에는 작은 열쇠구멍이 있었다.

숟가락 끝을 넣었다.

두 번 돌렸다.

위로 들었다.

안쪽에서 걸쇠가 밀렸다.

린은 미친 애였지만 틀린 적은 별로 없었다.

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창고에는 빈 약품 상자와 녹슨 운반대가 쌓여 있었다. 안쪽 계단은 지하로 이어졌다. 계단 옆에는 오래된 화물용 엘리베이터가 붙어 있었고, 층수 표시등만 꺼진 채 멈춰 있었다.

나는 발소리를 죽이며 내려갔다.

지하 1층.

한 층 더.

지하 2층.

세 번째 방 근처에는 오래된 관리 통로가 있었다. 벽 안쪽으로 들어가 몸을 웅크리자 금속 격자 너머로 살짝 열린 문 사이의 방 안이 보였다.

나는 그곳에서 린을 지켜봤다.

도와주기 위해서였는지는 몰랐다.

린이 처음으로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끝까지 보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전날의 눈이 계속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주스 머신은 린이 말한 것보다 더 낡고, 더 멀쩡했다.

일반 음료 자판기 정도의 크기였다.

탁한 검은색 외장은 군데군데 산화되어 있었다. 모서리와 문짝은 금고처럼 두꺼웠고, 그렇게 낡았는데도 찌그러지거나 벌어진 곳이 없었다.

상단에는 음료 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커피.

붉은 과일주스.

색이 바랜 탄산음료.

사진은 흰 조명으로 얕게 빛나고 있었고, 오른쪽에는 QWERTY 자판이 붙어 있었다. 글쇠는 두껍고 문자는 반쯤 닳아 있었다.

자판 위에는 Juicy Machine이라는 글자가 촌스러운 필기체로 휘어져 있었다.

우아한 척하는 글씨였다.

기계보다 그게 더 기분 나빴다.

배출구 아래에는 컵 하나를 놓을 만한 공간이 있었다.

받침 중앙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주변에는 말라붙은 음료 자국 하나 없었다.

방은 실험실이라기보다 오래된 서재에 가까웠다.

벽마다 책장이 있었고, 책 사이에는 유리관과 금속 기구가 끼어 있었다. 바닥에는 원형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The Man은 주스 머신 옆에 서 있지 않았다.

방 반대편에 놓인 고풍스러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검은 나무로 만든 넓은 의자였다. 등받이가 지나치게 높아 The Man의 긴 몸도 작아 보였다.

그는 다리를 겹치고 있었다.

한 손에는 두꺼운 책이 들려 있었다.

책을 읽는 것처럼 보였지만 하얀 얼굴에는 눈이 없었다.

린은 주스 머신 앞에 혼자 서 있었다.

배출구 아래에는 작은 유리컵이 놓여 있었다.

The Man이 준비한 것이었다.

주스 머신 옆 선반에는 낡은 주화들이 놓여 있었다. 한쪽 면에는 10¢, 반대쪽에는 닳은 기호가 새겨져 있었다.

The Man이 책에서 얼굴을 들지 않은 채 말했다.

“넣어라.”

린이 주화를 집어 슬롯에 넣었다.

기계 안쪽에서 동전이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짤랑.

음료 사진 옆에 초록불이 들어왔다.

The Man은 책장을 한 장 넘겼다.

“A SIP OF MY SOUL.”

린의 손이 QWERTY 자판 위로 올라갔다.

“그대로 입력해라.”

문장의 MY는 명령한 The Man을 뜻하지 않았다.

자판 앞에 선 린 자신을 뜻했다.

린은 자기 손으로 자기 영혼 한 모금을 주문해야 했다. 기계가 정말 그것을 내려줄지는 알 수 없었다. 내려온 것이 액체라면, 린은 유리컵에 받아 The Man에게 넘겨야 했다.

The Man은 책을 읽고 있었다.

아니, 읽는 척하며 린을 보고 있었다.

눈이 없는데도 알 수 있었다.

린의 어깨가 떨렸다.

손끝이 자판 위에서 미세하게 흔들렸다.

나는 금속 격자를 쥔 손에 힘을 줬다.

린보다 내 심장이 더 크게 뛰는 것 같았다.

The Man이 책장을 넘겼다.

린의 손이 멈췄다.

떨림이 너무 갑자기 사라져 오히려 이상했다.

린이 고개를 들었다.

평소의 멍청한 얼굴이 아니었다.

The Man이 책장을 넘기던 손을 멈췄다.

린의 손가락이 먼저 움직였다.

Y.

두꺼운 글쇠가 짧게 걸렸다가 내려갔다.

기계 안쪽에서 금속 핀 하나가 이동했다.

철컥.

The Man의 하얀 얼굴이 책 위로 들렸다.

O.

두 번째 글쇠가 내려갔다.

더 깊은 곳에서 톱니가 한 칸 넘어갔다.

The Man이 책을 덮었다.

책이 의자 팔걸이 위로 미끄러졌다.

검은 팔이 등 뒤에서 갈라져 린을 향해 뻗었다.

U.

린의 새끼손가락이 엔터 키를 내리쳤다.

텅.

다음 순간 The Man은 의자에서 사라져 있었다.

검은 촉수 끝이 린의 목 앞까지 왔다.

주스 머신 안쪽에서 낮고 무거운 진동음이 울렸다.

본체는 움직이지 않았다.

두꺼운 외장 안쪽에서만 거대한 장치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금속 부품이 연속해서 맞물리고, 닫힌 통 안에서 무언가를 짜내는 듯한 압력음이 이어졌다.

촉수 끝이 린의 피부에 닿기 직전이었다.

소리가 멎었다.

배출구 끝에 검은 것이 맺혔다.

유리컵은 바로 아래에 있었다.

정상적인 액체라면 그 안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검은 방울은 빛을 반사하지 않았다.

그림자를 둥글게 구겨 배출구 끝에 매달아놓은 것 같았다.

방울이 배출구 안쪽으로 한 번 튀었다.

다시 한 번.

그다음 유리컵을 비껴 공중으로 튀어나왔다.

측면 반환구에서 주화가 뱉어졌다.

챙.

검은 방울이 린의 오른발 옆에 떨어졌다.

똑.

가장 먼저 사라진 것은 바닥의 색이었다.

회색 시멘트 위로 검은색이 퍼졌다.

칠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검은 면에 닿은 바닥이 깊이를 잃었다. 책장을 받치고 있던 벽이 지워졌다. 천장 조명이 사라지고, 문과 바닥의 경계가 풀렸다.

고정된 구조물이 현실의 배경에서 빠져나갔다.

그런데 린은 남아 있었다.

The Man도 남아 있었다.

주스 머신과 유리컵, 넘어져 있던 책과 이동식 금속 기구도 그대로였다.

내가 숨어 있던 관리 통로의 벽이 사라졌다.

손으로 붙잡고 있던 금속 격자는 고정할 벽을 잃은 채 내 손에 매달렸다.

삼켜진 것은 우리가 아니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방이었다.

시멘트와 벽지와 천장 뒤에서 더 깊은 검은 공간이 드러났다.

방은 무너지지 않았다.

한 겹 벗겨졌다.

지하 2층 세 번째 방에 있던 사람과 물건들이 그대로, 다른 장소 위에 펼쳐졌다.

바닥처럼 보이는 검은 면은 멀리까지 이어졌다.

천장은 없었다.

책장이 있던 자리 너머에는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구조물들이 비뚤어진 각도로 서 있었다. 가까워 보였고, 동시에 끝없이 멀었다.

바람은 없었다.

그런데 린의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움직였다.

주스 머신은 검은 공간 한가운데 남아 있었다.

꺼진 음료 사진.

낡은 외장.

촌스러운 필기체.

그리고 그 뒤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자세는 느슨했다.

한쪽 팔을 의자 등받이에 걸치고 있었다. 얼굴과 옷의 경계는 잘 보이지 않았다. 분명 나를 향하고 있지 않았는데도, 나와 린과 The Man을 한꺼번에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린이 숨처럼 이름을 말했다.

“Curious.”

호명된 것이 고개를 들었다.

“나?”

목소리는 가벼웠다.

잘못 배달된 물건을 확인하는 사람 같았다.

The Man은 린에게 뻗던 팔을 멈췄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그는 새로 열린 공간과 주스 머신 뒤의 존재를 동시에 파악했다.

하얀 얼굴이 잠깐 내가 있던 쪽으로 돌아왔다.

그가 내가 따라온 사실을 언제부터 알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The Man은 다시 Curious를 봤다.

린은 더 이상 첫 번째 목표가 아니었다.

The Man의 팔이 네 갈래로 갈라졌다.

검은 칼날들이 바닥을 찍었다.

긴 몸이 앞으로 튀었다.

한순간 전까지 린 앞에 있던 형체가 주스 머신을 넘어 Curious의 목 앞까지 도달했다.

빨랐다.

칼날 하나가 Curious의 얼굴을 스쳤다.

검은 표면에 얇은 선이 생겼다.

그 틈에서 검은 액체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Curious가 웃었다.

“나부터 고른 건 맞았어.”

공중이 번졌다.

손이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손을 본 기억은 없었다.

다섯 개의 긴 흔적이 The Man의 팔다리와 목을 동시에 붙잡았다.

The Man은 몸을 비틀었다. 촉수가 검은 바닥을 찢었고, 칼날이 허공을 베었다.

한 합이었다.

그 한 번으로 끝났다.

공중의 흔적이 안쪽으로 오므라들었다.

The Man의 긴 팔이 접혔다.

다리가 허리 쪽으로 꺾였다.

검은 외피와 하얀 얼굴이 몸의 중심으로 우겨졌다.

뼈 부러지는 소리는 한꺼번에 나지 않았다.

우득.

우드득.

젖은 종이를 여러 겹 구기는 것처럼 소리가 이어졌다.

사람보다 컸던 형체가 여행 가방만 해졌다.

다시 머리통만 해졌다.

마지막에는 주먹보다 조금 큰 고깃덩어리가 남았다.

Curious가 손가락을 털듯 허공을 움직였다.

덩어리가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툭.

요코가 쓰레기통에 버려졌을 때보다 가벼운 소리였다.

나는 손에 남아 있던 금속 격자를 걷어찼다.

검은 공간 쪽으로 몸을 던졌다.

떨어지는 높이는 한 팔 정도였는데 바닥에 닿기까지 이상할 만큼 오래 걸렸다.

무릎이 검은 면에 부딪혔다.

린이 나를 봤다.

나는 바닥의 덩어리를 봤다.

The Man.

저 새끼가 죽으면, 남는 걸 먹어줘.

“미친 새끼.”

내가 누구에게 한 말인지는 몰랐다.

린인지.

The Man인지.

나 자신인지.

덩어리는 아직 움직였다.

표면에서 가느다란 검은 실이 나오려다 다시 살 안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그것을 집었다.

무거웠다.

주먹만 한 크기인데 사람 한 명을 통째로 든 것 같았다.

처음에는 냄새가 없었다.

입 가까이 가져가자 냄새가 생겼다.

젖은 천.

오래된 피.

요코가 사라진 방의 시멘트.

칼슨의 식은 커피.

나는 토할 것 같았다.

“빨리.”

린이 말했다.

그는 Curious를 보고 있었다.

Curious는 나를 보고 있었다.

“다른 방법 없어?”

린이 고개를 저었다.

“몰라.”

“모르는데 먹으라고 했냐?”

“응.”

덩어리가 내 손 안에서 한 번 뛰었다.

린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도 이다음에 무엇이 일어날지 몰랐다.

그런데도 나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Curious가 바로 앞에 앉아 있었다. 그 순간 내가 붙잡을 수 있는 건, 린이 미리 남긴 말뿐이었다.

나는 덩어리를 물었다.

표면은 고무처럼 버텼다.

이를 더 깊게 박자 얇은 껍질이 터졌다.

안에서 피 대신 차가운 실이 쏟아졌다.

실이 잇몸을 감았다.

혀 밑으로 들어갔다.

입천장과 뺨 안쪽에 달라붙었다.

나는 뱉으려 했다.

덩어리가 내 입 안쪽을 붙잡았다.

씹는 일이 아니었다.

서로의 안으로 들어가려는 일이었다.

나는 턱에 힘을 줬다.

한 번.

질긴 것이 늘어났다.

두 번.

실 하나가 끊어졌다.

덩어리가 목구멍으로 미끄러졌다.

구역질이 올라왔다.

검은 실이 목 안쪽에 매달려 내려가지 않았다.

나는 손가락을 입에 넣어 꺼내려 했다.

실이 손가락을 감고 다시 안쪽으로 기어들었다.

그것도 나를 먹고 있었다.

나는 턱에 남은 덩어리를 다시 씹었다.

세 번째로 이가 맞물렸을 때 질긴 것이 끊어졌다.

차가운 잔해를 삼켰다.

가슴 안에서 무언가가 펴졌다.

내 그림자가 먼저 몸을 일으켰다.

나는 아직 무릎을 꿇고 있었다.

오른손을 움직이려 했는데 왼쪽 어깨 뒤에서 손가락이 움직이는 느낌이 났다.

숨을 들이켰다.

폐가 한 박자 늦게 부풀었다.

몸 안쪽에서 다른 것이 내 움직임을 따라 했다.

처음에는 서툴게.

조금 뒤에는 더 정확하게.

Curious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둘은 본 적 있는데 셋은 처음이네.”

린은 말이 없었다.

“하나는 불렀고.”

Curious가 린을 가리켰다.

“하나는 덤볐고.”

바닥에 남은 검은 얼룩을 가리켰다.

“하나는 먹었고.”

이번에는 나를 봤다.

“재밌다.”

말투는 밝았다.

그래서 더 나빴다.

그 뒤로 Curious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스 머신의 표시창에 숫자가 떠올랐다.

6 0 : 0 0

숫자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나는 처음 십 분 동안 세 번 토했다.

검은 실이 침과 함께 바닥으로 흘러나왔다. 실은 검은 면 위에서 잠시 꿈틀거리다가 방향을 바꿔 내 손목을 타고 올라왔다.

나는 떼어내려 했다.

실이 피부 아래로 들어갔다.

그림자는 내 움직임을 기다리지 않았다.

내가 고개를 들기 전에 Curious를 봤고, 손을 짚기 전에 검은 바닥을 눌렀다.

린은 한 걸음 가까이 왔다가 멈췄다.

내 그림자가 그의 발목을 향해 길어졌기 때문이다.

“오지 마.”

내가 말했다.

목소리가 두 번 들렸다.

하나는 입에서 나왔고, 다른 하나는 목 뒤에서 늦게 따라왔다.

린은 내 옆에 앉았다.

손이 닿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남겼다.

시간이 줄었다.

4 3 : 1 2

린이 기침했다.

손바닥에 작은 피가 묻었다. 그는 피를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Curious는 보고만 있었다.

질문하지 않았다.

왜 자기를 불렀는지.

왜 내가 The Man을 먹었는지.

왜 린이 아직 도망치지 않는지.

이미 답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2 7 : 4 0

내 오른손은 무릎 위에 있었다.

그런데 손가락의 감각은 바닥을 기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 방 안에 없는 팔과 다리의 위치가 느껴졌다. 등 뒤에는 무언가 길게 접혀 있었고, 목 안 쪽에는 얼굴 없는 머리 하나가 내 시선을 빌려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 사이에서 검은 것이 울렸다.

린은 계속 주스 머신 뒤쪽을 봤다.

검은 공간 멀리 서 있는 구조물들.

그 사이를 지나가는 형체들.

책에서 읽었던 문장이 실제로 이어지는 곳.

두려워하고 있었다.

동시에 즐거워하고 있었다.

0 8 : 0 3

“네가 뭘 부른 건지 알아?”

내가 물었다.

린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근데 이름은 알잖아.”

“이름만 알았어.”

“그게 더 위험한 거 아냐?”

린이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았다.

“그러니까 확인해야지.”

미친 애였다.

끝까지.

표시창의 숫자가 마지막으로 줄었다.

0 0 : 0 1

0 0 : 0 0

Curious가 손을 들었다.

검은 공간 한쪽에 직사각형의 빛이 생겼다.

실험동 지하 2층 세 번째 방의 출입문이었다. 문 너머에는 회색 벽과 형광등이 보였다.

“둘 중 하나는 살려줄게.”

Curious가 말했다.

“선착순이야.”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다시 만나면 내가 직접 찢어 죽이는 조건으로.”

린이 손을 들었다.

말이 끝난 것과 거의 동시에였다.

“난 여기 남을래.”

Curious가 눈을 가늘게 떴다.

린이 나를 가리켰다.

“쟤를 내보내.”

“린.”

나는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내 것이 아닌 것처럼 흔들렸다.

“뭐.”

“같이 나와.”

“안 돼.”

“왜.”

린의 눈이 빛났다.

겁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겁보다 먼저 보고 싶은 것이 생긴 눈이었다.

주스 머신 뒤.

Curious가 있던 장소.

검은 공간 너머에 서 있는 구조물들.

책에만 적혀 있던 존재들.

답.

린은 나를 살리고 싶어 했다.

그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동시에 이곳에 남고 싶어 했다.

그것도 거짓이 아니었다.

린에게는 두 가지가 같은 선택이었다.

그는 잡혀 남는 게 아니었다.

자기 자신을 판돈으로 올리고 있었다.

“싫다고 해.”

내가 말했다.

“이미 골랐어.”

“취소해.”

“내가 이겼잖아.”

“무슨 소리야.”

“이번엔 내가 고를게.”

나는 린에게 달려갔다.

검은 바닥이 뒤로 밀렸다.

발은 앞으로 나갔는데 거리는 줄지 않았다. 러닝머신 위에서 뛰는 것처럼 다리만 움직였다.

나는 손을 뻗었다.

린도 손을 들었다.

손끝 사이에는 계속 같은 거리가 남았다.

뒤에서 문이 나를 잡아당겼다.

몸이 앞으로 날아가는 것 같은데 실제로는 제자리에서 허공만 긁고 있었다.

“오지 마.”

린이 말했다.

“닥쳐.”

“이번엔 네가 나가.”

“같이 가.”

“싫어.”

린은 잠깐 웃었다.

기침하다 자기 소리에 놀라던 얼굴이었다.

빵을 국에 찍어 먹던 얼굴.

미스터리에는 답이 있다고 말하던 미친 애.

“내일부터 내가 널 지켜볼게.”

바닥이 접혔다.

검은 구조물들이 뒤로 밀려났다.

린과 Curious와 주스 머신이 한 장의 검은 면 안으로 작아졌다.

나는 계속 뛰었다.

손을 뻗었다.

린의 손가락이 멀어졌다.

검은색이 꺼졌다.

형광등이 켜졌다.

나는 실험동 지하 2층 세 번째 방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책장이 있었다.

벽이 있었다.

천장도 있었다.

하지만 방 안에는 주스 머신이 없었다.

린도 없었다.

The Man도 없었다.

방 반대편에 있던 의자만 넘어져 있었다.

바닥의 원형 문양 가운데에는 검은 점 하나가 남아 있었다.

손톱보다 작았다.

나는 그것을 만지지 않았다.

한 시간이 지나도록 The Man은 돌아오지 않았다.

린을 데려간 실험도 예정된 시간을 넘겼다.

복도 바깥에서 기계음이 울렸다.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고 있었다.

층수를 알리는 숫자가 바뀌었다.

지하 1층.

지하 2층.

문이 열렸다.

칼슨의 구두가 복도 바닥을 밟았다.

한 손에는 권총이 있었다.

다른 손에는 고아원 식당에서 들고 나온 커피잔이 있었다.

그는 복도로 나오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이미 식은 냄새가 복도까지 퍼졌다.

“The Man.”

대답은 없었다.

“린.”

대답은 없었다.

칼슨은 잔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권총을 양손으로 잡았다.

“나와.”

나는 세 번째 방 옆의 준비실로 몸을 숨겼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지 않았다.

목구멍 안쪽에서 검은 실이 움직이는 느낌이 났다.

칼슨이 복도를 걸었다.

그는 세 번째 방 앞에서 멈췄다.

바닥의 검은 점을 봤다.

관리 통로에서 떨어진 금속 격자를 봤다.

그리고 내 쪽으로 총구를 돌렸다.

“거기 있지.”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칼슨이 한 걸음 다가왔다.

“나오면 다리는 안 쏜다.”

아이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고장 난 물건을 꺼내는 사람의 말투였다.

나는 옆방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운동화 밑창이 바닥에 스쳤다.

칼슨의 총구가 소리를 따라왔다.

그는 알고 있었다.

내가 숨었다는 것도.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는지도.

정면으로 나가면 죽는다.

다른 길은 없었다.

나는 문틀 뒤에서 몸을 낮췄다.

칼슨이 다가왔다.

세 걸음.

두 걸음.

한 걸음.

몸 안쪽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소리가 멀어졌다.

형광등의 전기음도, 칼슨의 숨소리도, 내 심장 소리도 얇아졌다.

벽에 붙어 있던 그림자가 사라졌다.

내 몸의 위치가 내 감각에서도 빠졌다.

칼슨의 총구가 내가 숨은 자리에서 옆으로 지나갔다.

그의 눈이 나를 보지 못했다.

딱 한순간이었다.

나는 뒤에서 뛰어올랐다.

팔을 칼슨의 목에 걸었다.

그의 등에 올라타 다리를 허리에 감았다.

칼슨이 몸을 숙였다.

내 등이 들렸다가 벽으로 처박혔다.

숨이 빠졌다.

팔을 놓지 않았다.

칼슨은 왼손으로 내 팔을 잡아당겼다. 오른손에 든 총을 뒤로 꺾었다.

총구가 내 옆구리를 향했다.

나는 발을 뻗었다.

뒤꿈치가 그의 손목에 닿았다.

탕.

총알이 천장으로 올라갔다.

콘크리트 가루가 얼굴에 쏟아졌다.

나는 다시 발을 찼다.

권총이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칼슨은 몸을 돌려 나를 벽에 내리쳤다.

팔이 풀렸다.

나는 바닥에 떨어졌다.

칼슨이 내 머리카락을 잡았다.

얼굴이 위로 들렸다.

주먹이 들어왔다.

입술이 터졌다.

두 번째 주먹이 오기 전에 손가락을 뻗었다.

검지와 중지가 칼슨의 왼쪽 눈에 들어갔다.

손톱 밑으로 뜨거운 것이 밀려왔다.

칼슨이 처음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가 나를 놓쳤다.

나는 바닥에 엎어졌다.

권총은 복도 반대쪽에 있었다.

칼슨도 봤다.

둘이 동시에 움직였다.

나는 기었다.

칼슨은 한 손으로 눈을 누른 채 몸을 던졌다.

그의 팔이 내 발목을 잡았다.

나는 앞으로 넘어졌다.

턱이 바닥에 부딪혔다.

칼슨이 내 다리를 끌어당겼다.

나는 바닥 모서리를 잡았다.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권총까지 한 팔이 남았다.

칼슨이 내 허리 위로 올라탔다.

팔꿈치가 등뼈를 눌렀다.

“가만히 있어.”

그가 말했다.

“너도 서류 하나면 끝나.”

나는 손을 뻗었다.

닿지 않았다.

몸 안쪽에서 또 다른 팔을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다.

내 오른팔은 바닥에 있었다.

그런데 바닥의 그림자가 손보다 반 뼘 더 길어졌다.

검은 손끝이 권총 손잡이에 스쳤다.

권총이 바닥을 긁으며 조금 움직였다.

그게 전부였다.

칼슨이 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돌렸다.

나는 몸을 비틀었다.

그의 손등을 물었다.

피 맛이 났다.

칼슨이 팔을 뺐다.

나는 다시 기었다.

손끝이 권총 손잡이에 닿았다.

차가웠다.

생각보다 무거웠다.

칼슨이 내 손목을 잡으려 했다.

나는 방아쇠를 당겼다.

탕.

첫 발이 그의 어깨를 뚫었다.

칼슨의 몸이 옆으로 흔들렸다.

그는 멈추지 않았다.

한쪽 눈에서 피를 흘리며 내 목을 향해 손을 뻗었다.

탕.

두 번째 발이 가슴에 들어갔다.

칼슨이 무릎을 꿇었다.

나는 일어났다.

총구가 떨렸다.

칼슨은 나를 올려다봤다.

아직도 내가 아이로 보이는 얼굴이었다.

요코가 쓰레기통에 버려지던 소리가 떠올랐다.

툭.

사라진 아이들의 의자가 하나씩 치워지던 식당.

친척 인계.

적응 장애.

선천성 질환.

칼슨의 서류.

칼슨의 커피.

허리에 차고 다니던 총.

열두 살부터 열네 살까지의 시간이 방아쇠 안에 들어 있었다.

탕.

세 번째 발이 칼슨의 얼굴을 뒤로 젖혔다.

그는 바닥에 쓰러졌다.

총성이 멎자 복도는 지나치게 조용해졌다.

형광등 소리가 다시 들렸다.

내 숨소리도 돌아왔다.

그림자가 발밑으로 늦게 기어왔다.

칼슨은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처음 죽인 사람이었다.

요코를 죽인 것은 The Man이었다.

린을 데려간 것은 Curious였다.

칼슨은 내가 죽였다.

그 차이는 나중에도 없어지지 않았다.

나는 총을 내려놓지 못했다.

손가락이 방아쇠에 붙어 있었다.

한참 뒤에야 손을 폈다.

권총이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칼슨의 주머니를 뒤졌다.

열쇠.

지갑.

휴대전화.

화면에는 금이 가 있었다.

손에 묻은 피 때문에 화면이 잘 눌리지 않았다. 소매로 닦고 번호를 입력했다.

신호음이 갔다.

한 번.

두 번.

세 번.

“경찰입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입이 열리지 않았다.

목구멍에는 아직 The Man의 실이 걸려 있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다시 물었다.

“여보세요?”

나는 복도 위쪽을 봤다.

고아원 건물은 산길 위에 있었다.

그 안의 닫힌 방문들.

아무것도 못 본 척하는 아이들.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이름들.

“여기.”

목소리가 갈라졌다.

나는 침을 삼켰다.

“아이들이 많이 갇혀 있어요.”

상대가 무언가를 물었다.

주소.

이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고아원 현관에 적혀 있던 도로명을 말했다.

“실험하고 있어요.”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빨라졌다.

나는 칼슨의 열쇠를 집었다.

“구해주세요.”

내 이름은 말하지 않았다.

전화는 끊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복도 바닥에 내려놓았다.

칼슨의 열쇠로 실험동 계단 문을 열었다.

지상으로 올라가 창고 뒷문을 나섰다.

비가 더 굵어져 있었다.

나는 산길을 거슬러 고아원으로 돌아갔다.

식당에는 칼슨이 먹다 남긴 저녁이 놓여 있었다.

그의 빈자리 옆에는 식어버린 커피 냄새가 남아 있었다.

복도에는 아이들의 방문이 닫혀 있었다.

나는 열쇠를 하나씩 맞춰봤다.

첫 번째 문.

두 번째 문.

세 번째 문.

남아 있는 문을 차례로 열었다.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복도를 따라 이어졌다.

문이 바로 열리지는 않았다.

문틈 사이로 눈이 보였다.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았다.

나도 나오라고 말하지 않았다.

칼슨의 열쇠로 현관 안쪽 잠금을 풀었다.

정문을 열었다.

차가운 비바람이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문을 닫지 않았다.

나는 혼자 산길을 달렸다.

운동화에서 물이 튀었다.

입안에는 칼슨의 피와 The Man의 냄새가 함께 남아 있었다.

몸 안에서는 내가 아닌 것이 달리고 있었다.

그림자가 내 발보다 먼저 길 위를 밟았다.

얼마나 달렸는지 몰랐다.

숨이 끊어질 것 같아 도로 옆에 멈췄다.

손을 펴보니 린의 이름표가 있었다.

언제 잡았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투명한 비닐 끝에 검은 방울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빗물이 손바닥을 때렸다.

방울은 흔들리지 않았다.

떨어지지도 않았다.

그날 나는 The Man을 먹었다.

린은 지옥에 남았다.

칼슨은 내가 처음 죽인 사람이 됐다.

그리고 한 방울은 아직 떨어지지 않았다.